[일반리뷰부문] <연민의 굴레> 리뷰: 성장물이 아닌,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본격 학원물

<연민의 굴레> 리뷰: 성장물이 아닌,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본격 학원물


글/그림: 재활용


웹툰에서 학원물은 일반적으로 세 부류로 나뉩니다. 폭력물, 연애물, 초능력물. 학원물 중에서 이 부류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정말 드뭅니다. 그래서 학원물에서 저 세 가지에 해당하지 않는 신선한 장르를 보고 싶다고 종종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바꿔 생각해보면, 학원물이 저 세 가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폭력, 연애, 초능력이라는 요소를 가미하지 않은 학교생활 그 자체는 정말 단조롭기 때문입니다. 초능력이나 연애 같은 요소가 없는 대다수 학생들에게 학교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반복입니다. 수업, 시험, 야자만으로 가득 찬 굴레. 그 굴레 자체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기는 너무 힘듭니다.

<연민의 굴레>는 학원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엔 연애도 없고 폭력도 없고 초능력자도 없습니다. 주인공 두 사람의 이름 ‘차련’과 ‘안민’의 이름을 따서 제목을 만들었으니 독자들은 자연스레 두 사람이 이어지길 기대하지만 그럴 기미도 없습니다. <연민의 굴레>는 정말 드문 순수 학교물입니다. 이 작품은, 짧고 거칠게 말하면 학교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렇게만 요약하고 넘어가기엔 다소 아쉬운 작품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은 정말 재미가 없다


<연민의 굴레>의 첫 대사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은 정말 재미가 없다.” 차련은 저 문장에서 ‘세상’을 ‘학교’로 바꿔서 몇 번이고 되뇌입니다. ‘학교는 재미가 없다’고. 고등학교 2학년인 차련은 딱히 공부를 잘 하지도 않고 잘 할 생각도 없습니다. 학교생활은 차련에게 무미건조합니다. 동급생인 이웃사촌 안민은 모범생이고 인기도 많습니다. 차련은 안민에게 학교가 재밌냐고 물어보지만, 안민 역시 학교생활이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안민은 꾹 참고 모범생 코스프레를 하고 있을 뿐이고, 차련은 그 코스프레마저 안 할 뿐입니다.

학교는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요. 학교는 오직 지나가는 과정입니다. 학교는 언제나 더 상위의 목표, 졸업 이후의 시간들을 위해 유예해야 하는 시간으로 채워집니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도, 모두 사치로 간주되지요. 이 구도에서 이후의 무언가를 위해서가 아닌 그 자체의 재미는 무의미합니다. 학교는 그런 재미를 시간낭비이자 귀중한 미래를 준비할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설정하는 공간입니다. 학교에서 ‘의미’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나중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것들입니다. 공부에 도움이 되는 친구, 또는 공부 스트레스를 풀어줄 수 있는 동아리, 대입 자소서에 한 줄이라도 더 쓸 수 있는 봉사활동 등등. 

물론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재미없는 일들을 옛날처럼 학생들의 머리에 주입하기만 해서는 점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레퍼토리는 조금 달라집니다. 조금 더 ‘쿨한’ 어른들은 “하고 싶은 걸 해라!”고 말합니다. 학생들은 “주체적 인간”이 될 것을 요구받습니다. 서점가를 한때 점령했던 낡은 문구들은 이제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괴롭히는 망령이 되어 학생기록부에 남습니다. 사실 하고 싶은 걸 하라는 말은 좋아하는 게 있으면 그냥 해 보라는 말이 아니라, “좋아하는 걸 찾아서 죽도록 한 다음 좋은 결과를 내라!”의 줄임말입니다. 가령 농구를 하려면 그냥 쉬는 시간에 농구를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슬램덩크>의 주인공들처럼 열의를 불태울 것을 요구합니다. 사실 이런 새로운 레퍼토리도 재미없긴 매한가지입니다. 어쨌든 뭔가를 하라고 강제로 시키는 것이고, 그걸 완곡하게 자기계발의 형태로 표현할 뿐입니다.

안민은 자신의 취미인 농구를 학교 활동 속으로 집어넣지 않습니다. 농구를 좋아한다면 농구 동아리에 들어가는 거 아니야? 라고 묻는 차련에게, 안민은 동아리에 들어가는 순간 농구가 재미없어져 버릴 거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농구부에 들어가는 순간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부담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현명하게도 지루한 학교생활과 자신의 취미를 구분시킴으로써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거리를 지켜냅니다.(다만 학교 간 경기 때 주변 사람들의 기대대로 출전하면서 적당히 먹을 것을 챙기는 약삭빠름도 보여줍니다) 하지만 차련은 안민처럼 좋아하는 것도, 좋아해보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고작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풀떼기 ‘보헤미안’ 뿐인데 그나마도 챙겨주는 걸 잊어먹습니다. 엄마가 보고 있던 TV에서 나오는 “주체적 인간이 되세요!”라는 문구가 무색하게, 차련의 삶은 무척 무미건조합니다. 물론 그런 자신의 상태가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차련은 교무실에서 “저 학교 그만둘래요”라는 폭탄 선언을 했다가, 막상 자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는 생각 때문에 곧바로 그 말을 취소하고는 펑펑 울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학교가 재미없는 건 차련과 안민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학교생활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염증을 느끼고 있다고 해야 맞겠지요. 그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회색빛 학교생활 채색하기


그렇다면 이 재미없는 학교에서 무언가 재미있는 걸 하는 건 어떻게 가능할까요? 모두 놔 버린 이 질문을 진지하게 붙잡는 모임이 있습니다. 안민이 들어간 학생부와 차련이 들어간 동아리 미스터리 클럽이 그것입니다. 두 모임은 사실 외부에서 보면 엉망입니다. 학생회 임원 대부분은 학교 일엔 관심이 없고 시시껄렁한 잡담만 늘어놓습니다. 미스터리 클럽은 하릴없이 늘어져서 시간을 때우는 일상이 다반사입니다. 그들은 딱히 ‘어떤 것’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뛰어다니고 빈둥거리고 떠드는 게 다입니다. 가입 직후 이 조직들의 황당함에 혀를 찼던 주인공들은, 점차 그 뻔뻔스러울 정도의 태연함에 익숙해집니다.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을 하나둘씩 대면합니다.

스토리 전개상, 두 모임에는 각각 핵심인물이 있습니다. 미스터리 클럽의 핵심인물이 양한나라면, 학생회에는 채승은이 있습니다. 연민의 굴레 중반부(본편)는 채승은(과 김희완)의 이야기가, 그리고 후반부(프롤로그)는 양한나의 이야기가 전체 스토리의 축을 구성합니다. 승은과 희완, 한나는 모두 과거의 어떤 기억들과 경험들 때문에 마음 속 어딘가 일그러짐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범생인 척 하는 안민과 모범생인 척 하려고도 들지 않는 차련을 만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연민의 굴레는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스토리의 전개는 그리 직선적이지 않습니다. 차련이 사람들과 친해지며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방향으로 다가가거나, 안민이 학생회에서 인정받으며 회장으로 우뚝 서는 등의 결론을 향해 나아가지 않습니다. 과거 승은과 희완의 상처가 무엇인지 곧바로 꺼내면서 그걸 치유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접근을 취하지도 않습니다. <연민의 굴레>가 독특한 것은, 그리고 뛰어난 점은 바로 이 스토리의 전개방식입니다. 재활용 작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맥락적으로 구성하며 모자이크처럼 한 칸 한 칸 채워나가는 가운데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그래서 어느 화에서는 저녁 먹으러 가는 희완이 주인공이었다가, 안민의 동생 미나가 오빠와 투닥거리며 이야기의 주역이 되기도 하고, 학생회장 임선재의 이뤄질 수 없는 러브스토리가 구구절절 펼쳐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소소한 일상들이 하나씩 겹쳐지며 재미없던 학교생활은 조금씩 채색됩니다. 인물들 사이에 관계와 시간이 축적되며, 어느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터져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여전히 차련이 중심인물인 것은, 결국 차련을 중심으로 인간관계가 조금씩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이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 차련만큼 붙임성있는 인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안민은 범생이 코스프레에 짜증내는 소심한 남학생이고, 채승은은 자기중심적이고 고집불통인 괴짜이며, 김희완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적 성격의 인물입니다. 그냥 두었다면 절대로 친해질 리 없었던 이들은, 차련을 중심으로 집에서 모이기도 하고 저녁을 먹기도 합니다.


변하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괜찮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일그러짐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주변으로부터 어떤 기대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안민은 엄마가 없는 집에서 동생과 함께 잘 지내는 훌륭한 모범생의 역할을 기대받습니다. 공감능력이 별로 없던 김희완은 가족과 잘 지내려고 감정을 꾸며 행동하다가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채승은은 종종 내면이 폭발하는 자신의 증상을 치료하려는 사람들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보입니다. 이들 중 누구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특정 양식으로 행동하거나 고쳐지길 기대받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병원에 데리고 가거나 행동교정 프로그램에 출연시키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문제가 있는 건 아이들이 아니라, 그런 기대를 투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 기대가 사람을 왜곡시키고, 병들게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학교에는 그렇게 비틀려진 마음들이 모이고, 또다시 기대 속에서 불안을 학습받습니다. 학교에 모인 이들이 무기력하고 병리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불안해하는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주체적 인간’이 되기 위해 내면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아, 라는 말을 진정으로 건네주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그냥 던지는 것은 쉽지만, 그 말을 진정성 있게 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늘 어떤 기대를 잠재적으로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꼭 에반게리온에 탑승하라는 거창한 기대가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자녀들이 학교에서 성적이 떨어지지 않기를, 대학에 들어가기를, 진로를 잘 찾기를 바라는 그런 기대는 어른들에게 늘 내면화되어 있습니다. 그 기대를 괄호쳐두고, 지금 그대로의 상태를 괜찮다고 말로든 행동으로든 보여주기란 쉽지 않습니다.

결말에서 차련은 친구가 된 채승은에게, 지금 그대로도 괜찮다고 말해줍니다. 아니, 반대로 그 말을 건넨 순간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고집불통이고 괴짜에 걸핏하면 성질을 부리는 채승은이지만, 차련은 그런 승은이 있는 그대로 좋다고 말해줍니다. 승은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늘 어떤 모습으로의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들 뿐이었고, 승은은 그 기대에 맞서 싸우느라 도도한 어른인 척 하며 오랜 시간 스스로를 억눌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차련의 그 말로 인해, 승은은 겨우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혀 온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너, 지금 한 말 절대로 잊으면 안 돼, 라고 차련에게 재차 확인하면서.

이렇게 보면 이 작품의 후반부인 프롤로그는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에필로그가 아니라 프롤로그가 작품 후반부에 배치되었다는 것은, 작품의 전체 구성이 일종의 도돌이표 형식을 띄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구성은 어떤 함축을 갖고 있을까요? 양한나의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의 이야기가, <연민의 굴레> 본편을 보는 독자들에게 어떤 생각을 던져줄까요? 지금까지의 논의를 가지고 프롤로그를 보면, 한나와 오빠의 이야기는 차련이 없었던 안민과 안미나의 이야기였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한나에게는 주변에 차련처럼 자신을 포용해주는 사람 대신 오직 자신을 훌륭한 동생으로 키우려는 오빠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오빠의 기대를 체화한 내면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던 한나가 그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중학교에서 만난 학생회장 이태원 덕분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고등학교에서 이태원의 이름없는 동아리를 물려받은 뒤, 이태원에게 감사와 동경의 마음을 담아 그 동아리의 이름을 ‘미스터리 클럽’으로 정합니다. 사람들은 이 동아리가 미스터리mystery를 다루는 모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Mr. Lee의 팬클럽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나는 자신을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으며, 한껏 재미있는 학교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던 이 동아리를 차련과 미나에게 넘겨주면서, 본편의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결론


청소년을 다루는 작품이 으레 그러한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성장물이 아닙니다. 많은 작품에서 청소년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라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운동실력이 쑥쑥 오르거나, 성품이 더욱 깊어지거나 하며 말이지요. 이는 일상적으로 청소년이 표상되는 방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변하는 존재고, 더욱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계속해서 어떤 목표를 요구받습니다. 그 노선이 주는 괴로움, 그리고 그로부터의 일탈은 일시적이거나 일부에 국한되는 것으로 치부하면서요. 하지만 차련이 교무실에서 펑펑 울고 난 뒤 교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실 청소년들은 어디로 튈지,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는 존재입니다. 어떤 말에 어떻게 반응할지, 무엇이 그들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고,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것이겠지요.

물론 지금 그대로의 상태를 긍정한다는 것도, 그래서 현재의 즐거움과 재미를 누린다는 것도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만은 아닙니다. 정말 누군가는 발전을 필요로 하고, 또 원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우리는 언제나 쉬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고, 특히 청소년들에게 이 강박관념은 거의 노이로제 수준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잠시 동안의 휴식과 안정을 주는 건 무엇일까요. 그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건 무엇일까요. <연민의 굴레>는 그런 생각거리들을 던져주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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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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