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노란 책: 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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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에게 자유가 진정으로 주어지는 것은 어쩌면 '상상의 세계'뿐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해볼 수 있고 편집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구현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상상' 속에서 구현해 내는 개개인의 독특한 생각과 자연스러운 사건들은 어쩌면 그 사람의 진정한 '인식수준'이 투영된 본 모습에 가까울 수도 있다. 다만 그 답은 본인들만 알 뿐이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상상하는 많은 것들이 결국 나를 이룬다는 생각에 그 속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반성해보던 기억들이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선 이 작품 속 '미치코'처럼 깃드는 환상이 삶에 리듬과 활력을 주는 일도 종종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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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 타카노 후미코(Fumiko Takano)는 1979년 [절대안전면도칼]을 발표하며 데뷔하였는데 37년이 지나는 지금까지 [絶對安全剃刀 高野文子作品集(1982)], [おともだち(1993)], [棒がいっぽん(1995)], [るきさん(1996)], [ラッキ-孃ちゃんのあたらしい仕事(1998)], [黃色い本2002)], [しきぶとんさんかけぶとんさんまくらさん(2014)], [ドミトリ-ともきんす(2014], [おともだち 新裝版(2015)], [るきさん 新裝版(2015)]등의 단 몇 권의 작품집만을 발표한 독특한 만화가이기도 하다. 이 중에 현재 국내에 출간된 그녀의 작품집은 1995년 일본에서 출간되었던 [막대가 하나(2016)]와 2002년 출간되었던 [노란 책(2018)]이 있는데 한국에선 모두 북스토리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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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들의 출판 배경에 대해 북스토리 출판사의 관계자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2017년 제29회 부천국제만화 축제에서였다. 원래 북스토리 출판사에서 출간을 원했던 작품은 처음부터 [노란 책(黃色い本)]이라는 작품이었고 그것을 위해 일본 측과 접촉을 했는데, 테즈카 오사무 문화상의 수상작이었던 이 작품에 대한 국내의 수요에 대해 일본 측에서 의문을 제기했고 좋지 못 할지도 모르는 성적에 대한 걱정과 함께 회의적인 메시지를 표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스토리 측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좀 더 깊이 있는 대화를 했고 우선 그녀의 작품 중 [막대가 하나(棒がいっぽん)]를 먼저 출간하는 정성과 관심, 진심을 표했다고 한다. 그리고 필자가 2017년 관계자와 부천국제만화축제 기업 부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시점에는 이런 정성을 통해 조만간 [노란 책]도 발매가 될 수 있는 것 같다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리고 그사이 북스토리 출판사의 출판에 대한 자세와 타카노 후미코라는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 생겨 팟캐스트(성인수의 만화클래식)나 카페의 '만화뷰' 코너를 통해 [막대가 하나]나 빈 슐뤼스의 [피노키오(Pinocchio)/ 2014] 같은 작품을 소개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 기다림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북스토리의 정성이 느껴지는 표지 디자인과 질감, 내지의 어울리는 질감과 두께 등으로 [노란 책]이 2018년 출간되었다. 이런 부분은 북스토리 출판사의 정성과 진중함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고 늘 응원하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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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타카노 후미코의 그림체는 선으로 둥그렇게 표현해내는 캐릭터가 특징인데 그녀의 작품 속에는 항상 '운치'라고 부를 수 있는 여유와 낭만이 흐르고 있고 그것이 캐릭터의 행동들 속에 하나의 리듬감을 이루고 있어 자꾸 미소를 짓게 만든다. 물론 그 사이사이로 흐르는 '혁명'이라는 단어나 '단결'과 같은 요소들이 여러 단편 작품들 속에 흐르는데 그 또한 일상의 모습 속에서 차분히 메시지를 전하는 정도이기에 구현해 내는 이미지와는 조금 상반되는 매력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또 각 단편 작품 속 캐릭터들의 행동과 일상이 꼭 어떤 사건을 일으키며 스토리를 전개한다기보단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여러 사건을 독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 속에서 상상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제공하는데 그 여운이 인물들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다. 그리고 이런 '맛'은 적어도 한국에 출간되어있는 그녀의 작품들 속에서 전반적으로 느낄 수 있는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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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노 후미코의 단편집 [노란 책: 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에는 총 4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있는데 그중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노란 책: 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는 앞서 설명한 그런 상상의 세계를 마음껏 누리는 독서광 '미치코'의 사춘기의 끝자락을 다루고 있다. '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는 그녀가 로제 마르텡 뒤 가르(Roger Martin du Gard)의 소설 [티보가의 사람들(Les Thibault)]을 읽으며 빠져들게 된 인물이며 종종 대화를 나누고 삶의 여러 장소에 마치 VR처럼 상상으로 불러내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미치코'는 졸업을 앞두고 자신의 손재주를 살려 '옷 속에 입는 옷(작품에 표현 그대로)'를 만드는 일에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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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은 단조롭다. 독서광이기에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집안일을 열심히 돕고 동생의 장난에도 딱히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면서 학교에서 배운 재봉 수업의 기술과 자신의 재능을 살려 옷을 만드는 일을 조금씩 해보며 주변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있고 그녀 자신 또한 그 일에 관심을 느끼고 직업으로서도 고민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그녀 삶의 아주 짧은 한 피스만을 잠시 들여다보는 입장으로 이 단편을 읽게 되는데 그 순간,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이 바로 [티보가의 사람들]이다. 소설의 형식으로 써 내려 간 [티보가의 사람들]은 1937년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작가 로제 마르텡 뒤 가르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 의심 등을 표현한 작품이다. 두산 대백과에서 설명하고 있는 아래의 소개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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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940년 간행. 《회색 노트》 《감화원()》(1922), 《아름다운 계절》(1923), 《진찰》 《라 솔레리나》(1928), 《아버지의 죽음》(1929), 《1914년 여름》(1936), 《에필로그》(1940)의 8편으로 되어 있다. 작자는 이 작품의 전반에서, 20세기 초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젊은 세대의 시대적 고뇌를 그 직접적인 체험자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완고하고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의 가정에 태어난 자크가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인터내셔널 운동에 투신, 비행기 위에서 반전() 전단을 뿌리려다가 헛되이 추락사하기까지를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상식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의사였던 자크의 형 앙투안이 소집령을 받고 종군하다가 독가스에 중독되어 요양 중, 지난날의 자크의 언동과 그가 지키려고 했던 평화, 자크와 그 애인 사이에 태어난 유아()를 생각하며, 또 자기는 재기 불능임을 알고 앞으로 올 세대에 희망을 걸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대목에서 붓을 놓았다.

이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숨막히는 유럽 정세의 훌륭한 묘사, 작품 구성에 보이는 중후감, 작중 인물들의 각자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배려 등으로 보아서, 20세기 전반의 프랑스 소설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간주된다. 작자는 이 작품의 제7부 《1914년 여름》으로 1937년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특히 제7부에 묘사된 자크의 사상과 행동은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로 인간적인 세계의 건설을 추구하는 이상주의 그것으로서, 프랑스문학 빚어낸 가장 매력적인 인물상이 되었다.

[두산 지식백과]티보가네 사람들 [Les Thibault] (두산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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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코는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인 독서를 통해 일상 속으로 이 '자크'라는 인물을 불러낸다. 그 어떤 상황과 사건이 벌어져도 그것을 자신의 이상과 결부시켜 말을 만들고 에너지로 바꾸어 주변에 나누어주며 큰 힘이 되려고 하는 자크. 어쩌면 이런 소환은 사춘기 소녀의 마음에 가득히 상상될 금발의 멋진 남성에 대한 사랑도 물론 존재하겠지만 그것과 함께 작품 속 '그 시절의 미치코'가 지루한 일상과 정해져 있는 듯 보이는 미래에 대한 답답함, 이미 계산되는 재미없음에서 벗어나 진실로 하고 싶은 말과 진정으로 하고 싶은 행동들을 상상을 통해서라도 용기를 내어 보이게 만들어 주는 좋은 재료였을 것이다. 그래서 일상의 조류를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한 극동의 한 소녀가 자신의 취미와 함께 머금고 있는 감수성을 통해 즐기는 조용한 반항이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껴졌고 그것을 작가만의 위트로 풀어내는 점 또한 보기 즐거운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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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생각과 걱정은 싫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는 삶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을 위에 "그냥 좋아서"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이 어쩔 땐 고맙지만 미리 정해져 있기에 지루한 "그냥 흘러가는" 일상 속 사람들, 그래서 현실을 위험하진 않은 소소한 자극과 반항으로 채우길 원하지만, 상상 속에선 자신을 이 모든 것들로부터 용기를 가지고 뒤엎거나 진취적인 자세를 보일 수 있는 인물로 대입시켜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미치코의 이런 일상의 이야기는 귀여움과 함께 짧은 분량이지만 그 이상의 감수성을 분명 선물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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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책]은 그런 작품이었다.

끝.

Comments (1)
  • 제가 만든 저의 '자크'는 어떤 인물일지..
    영웅이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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