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BL, 혹은 GL(기존에 존재하는 작품의 캐릭터를 동성끼리 로맨틱/섹슈얼한 관계로 엮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공식에서 내 최애커플이 너무 사귀는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보통은 이 현상을 소위 ‘호모렌즈가 꼈다'고 표현하며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닌 자신만의 환상으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이와 같이 자기검열이 심해진 이유는 있다. BL, GL이 실제 동성애와는 거리가 있는 일종의 판타지이기 때문에, 이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실제 동성애자들에게 편견 섞인 질문을 하거나, 혹은 실제 동성애자들이 직접 BL, GL이 포함된 작품을 보다가 상처를 받는 일들이 있었고, 이런 일들로 인해 BL, GL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동성애자를 대상화하는 행위가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널리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BL의 경우엔 퀴어가 아닌 오타쿠 커뮤니티 내에서 이 장르를 향유하는 여성들이 일본어로 '썩은 여성'이라는 뜻의 '후조시'로 멸칭되기도 했었고.
하지만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해보자. 두 사람이 굳이 우정의 관계가 아니라 사귀는 것처럼 보일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지나치게 외면하는 것은 오히려 창작물에서 성소수자를 지우는 행위일 수도 있다. 진지하게 하는 얘기다! 창작물에서 성소수자를 지우지 마세요!
<그림1> 창작물에서 성소수자를 지우지 마세요…..
요즘 내 눈에 가장 사귀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 아니 두 동물은 바로 소닉과 테일즈다. 이 글에서는 진지하게! 소닉과 테일즈가 작중에서 어떻게 친구 이상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내가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또, 이런 고찰이 가지는 중요성과 좋은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선 소닉과 테일즈가 나오는 장르 '소닉 더 헤지혹'에 대해 설명해야할 것 같다. 그렇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소닉이다. 링을 모으며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음속의 고슴도치가 나오는 바로 그 게임 시리즈. 테일즈는 많은 분들이 기억하듯이 죽어도 계속 살아나며 소닉을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귀여운 꼬마 여우다. …사실 이 시리즈는 상당히 오래 전에 이미 스토리 컷씬이 가미된 3D 액션 게임으로 장르가 정착됐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도트로 된 소닉과 테일즈만을 기억하고 있다. 소닉 팬들은 여러분이 기억하는 옛날 소닉을 '클래식 소닉’, 요즘의 소닉을 '모던 소닉'으로 구분한다. 아무튼 많은 여러분이 기억하는 것은 '클래식 소닉'이기 때문에 이 글을 보면서 의아해 할 것이다. '대체 그 게임에서 무슨 관계성을 찾아볼 수 있지?’
<그림2>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소닉 게임/요즘의 소닉 게임
실은 그 시절부터도 두 사람이 친구 이상으로 그려졌지만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하고, 먼저 봐 줬으면 하는 것은 모던 소닉 게임들에서의 관계다.
'소닉 제너레이션즈'라는 게임이 있다. 2011년에 나온 이 작품은 소닉 2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으로, 소닉의 생일날 나타난 괴물 '타임 이터'가 시공간을 지워버려 소닉이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해 나가는 게임이다. 약간 메타적인 요소가 있는, 이때까지의 소닉 게임의 총집편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중요한 게임의 도입부가, '붙잡힌 히로인(Damsel in Distress, 주로 여성이 주인공의 행동 동기로서 납치, 감금되어 행동불능 상태가 되는 것)'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점철되어있다면? 당연히 누구나 이 '히로인'이 주인공과 연인에 준하는 관계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히로인’ 포지션에 들어가는 캐릭터는 다름아닌 테일즈다.
<영상1> 게임 '소닉 제네레이션즈'의 도입부
영상에 나오는 언어를 모르더라도 소닉이 가장 좋아하는 칠리독을 리본으로 묶어서 선물로 주는 테일즈와 이것을 받는 소닉의 대화, 타임 이터에게 마지막으로 잡혀가며 소닉의 이름을 외치는 테일즈를 보면 딱 느낌이 올 것이다.
상징적으로 풀이해보면, 칠리독은 소닉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 좋아하는 것을 선물하는 테일즈는 '소중한 사람'이며 소닉이 칠리독을 선물받는 것은 '행복한 순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굉장히 상징적으로 '소중한 사람이 준 좋아하는 것'이 날아가고 타임이터가 찾아온다. 여기에서 '행복한 순간'은 끝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타임이터가 '적'임을 알 수 있다. 그 '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소중한 사람'인 테일즈를 마지막으로 납치하고 그 순간, 테일즈는 소닉의 이름을 외친다. 이것은 명백하게 소닉의 행동 동기를 '납치된 테일즈'로 설정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서사다.
이것 하나 뿐이었다면 내가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붙잡힌 히로인’ 스테레오타입은 이 게임 외에도 여러 모던 소닉 게임들에서 반복된다. 특히 이 '소닉 제너레이션즈'와 또 다른 게임인 '소닉 컬러즈'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사소하지만 눈에 띄는 한 가지 제스쳐에 주목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위험한 대상 앞에서 손으로 가로막기'다.
<그림3>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나요?
물론 돈독한 우정에서도 이러한 제스쳐가 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미디어 안에서의 맥락과 스테레오타입의 측면에서 보자는 것이다. 나는 어떤 다른 미디어에서도 이 제스쳐를 친구관계에게 쓰는 걸 못 봤다. 연인, 혹은 혈연, 혹은 그만큼 중요하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보호할 때 미디어는 이 제스쳐를 사용한다. 이러한 제스쳐는 '붙잡힌 히로인'의 스테레오타입이 포함된 작품 내에서 주인공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킴과 동시에, 보호되는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다.
<그림4> 스테레오타입 of 스테레오타입
그리고, 클래식 시리즈를 비롯해서 소닉과 테일즈의 관계가 특별한 것처럼 묘사되는 부분은 아주 많다. 클래식 시리즈인 게임기어판 '소닉 더 헤지혹 2’, 그리고 최신작인 '소닉 로스트 월드'에서 테일즈는 또다시 '붙잡힌 히로인'의 역할로 나온다. '소닉 컬러즈'에서는 소닉과 테일즈가 단 둘이 유원지 테마의 적진으로 들어가며, 테일즈가 두 번 위기에 처한다. 또 마지막 한 번의 위기에서는 소닉이 테일즈를 구하고 자신을 희생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닉툰’ 1화에서는 소닉이 테일즈를 위험에 빠지게 하고싶지 않아서 그를 사이드킥 자리에서 해고하는 모습이 나온다(마지막에 다시 회유하면서 '비행기는 공짜로 줄게'라는 로맨틱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소닉과 테일즈는 동거하는 사이이며, '소닉툰'을 비롯한 각종 게임, 미디어 믹스에서 테일즈는 소닉에게 소위 콩깍지가 씌인 발언을 다수 한다. '소닉X'에서는 테일즈가 소닉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정도면 제발 테일즈를 메인 히로인으로 봐달라고 어필하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맥락적인 의미에서 스테레오타입이 중요하더라도, 여기에 얽매여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놓치는 것은 좋지 않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예를들어 소닉이 테일즈를 혈연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일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타인에게 이 정도의 애착을 가지는 것은 적어도 스퀴쉬(연애감정으로도 우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반적으로 두 감정의 사이로 여겨지는 끌림)일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소닉과 테일즈의 관계는 퀴어하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더 나아가 소닉과 테일즈가 시스젠더(트랜스젠더가 아닌 남성 또는 여성)가 아닐 가능성, 호모섹슈얼/호모로맨틱(동성에게 연애감정이나 성적끌림을 느끼는 것)이 아닌 바이, 팬섹슈얼/로맨틱(다양한 젠더에게 연애감정이나 성적끌림을 느끼는 것. 바이와 팬의 차이는 직접 찾아보기!)일 가능성, 혹은 에이 스펙트럼(에이섹슈얼, 혹은 에이로맨틱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일 가능성! 등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림5> 사실 나는 소닉이 에이 스펙트럼의 일부인 아코이로맨틱(연애감정을 느끼지만 연애 관계를 맺고싶어하지 않는 것, 또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쯤 되면 BL이 아니라고? 그게 포인트다. BL, GL이 동성애자에게 상처를 주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동성애자만을 대상화하고 이를 하나의 장르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왜곡된 이미지도 또 하나의 문제이지만,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후술하겠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의 사랑을 우리는 따로 무어라 부르지 않고 '로맨스'라고만 한다. 하지만 동성끼리의 사랑도 같은 '로맨스'일 뿐인데 이는 따로 분류하여 하나의 '장르’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상화 자체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대상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에는 어떤 작품도 탄생할 수가 없다. 그러니 기왕 한다면 더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고 실현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즐기는 게 가능해진다면 우리는 탈BL/GL하면서도 우리가 좋아하던 관계성을 향유할 수 있고, 시스젠더 게이/시스젠더 레즈비언을 대상화하는 것도 수많은 대상화 중의 하나가 되어 상처를 받는 사람도 훨씬 적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활동이 꼭 남을 위해서만 좋은 것도 아니다. 특히 왼/오(공/수의 요즘말. BL/GL에서 섹스할 때의 포지션에 관한 용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더 잘 알겠지만, 캐릭터의 성에 관한 요소들 또한 캐릭터 해석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더 많은 성정체성/지향성을 공부하면 더 많은 캐릭터 해석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즐거운 지는 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들 다양한 캐해석을 해줬으면 좋겠다…그래서 내 존잘님('자신이 좋아하는 창작자'를 뜻하는 덕후 용어)이 더 다양한 캐해석을 해주면 그걸 내가 또 받아먹고…크험.
<그림6> 젠더퀴어 섀도우 덕질 해주세요 존잘님들 (뜬금) (요즘 마이붐)
예를 들어 같은 장르의 또 다른 캐릭터인 섀도우(궁극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 여기에서 소개한다)의 경우, 공식 프로필에도 남성으로 적혀있고 팬덤의 대부분이 남성으로 해석하지만, BL/GL의 바운더리를 넘어서 생각해본다면, 젠더퀴어(트랜스젠더 중,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젠더)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 캐릭터라고 나는 생각한다. 솔직히 이런 연성('창작물'을 뜻하는 덕후 용어) 해주는 존잘님 한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본심).
앞서 BL/GL에서의 왜곡된 동성애자의 이미지에 대한 문제도 언급했었는데, 내가 괜히 더 많은 성정체성/지향성을 '공부'하자는 표현을 쓴 것이 아니다. 우리는 퀴어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퀴어에 대해 넓게 뿐 아니라 깊게도 알아야 한다. 사람을 그릴 때 인체에 대한 지식이 많을수록 도움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다못해 스틱맨을 그리는 것에조차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실제 퀴어에 대해 더 깊게 알게 된다면 이를 소재로 한 연성도 자연스럽게 더 좋은 연성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제 퀴어에게 실례를 끼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또, 실제 퀴어와는 다른 판타지로서의 창작물을 만들 때도 실제 퀴어에 대한 지식이 깊을수록 판타지와 실제를 잘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약간 비현실적이거나 비윤리적이더라도 그것에 대해 다른사람에게 주의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하게 되는 것이다.
종종 BL, GL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어차피 이걸 만든 사람은 그런 생각이 아니었겠지'라는 회의감 섞인 한탄을 듣곤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부분은 우리가 뻔뻔하게 굴어야 한다. 우리가 '호모렌즈'를 낀 것이 아니다. 만든 사람이 그런 스테레오타입을 썼으니까, 그런 요소를 넣었으니까, 우리의 캐해석도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주장해야 한다. 이 캐릭터 퀴어네! 라고. 그리고 그걸 뒷받침할 지식을 갖추고 있다면, 우리는 덕질을 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보이지 않는 퀴어들을 올바르게 가시화(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 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 퀴어한 쵱컾덕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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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