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그림을 못 그리니까 추상화한다고 깝치는 거야"
- 아티스트 1화 中, 화가 곽경수
나는 웹소설, 웹툰, 게임시나리오 등을 쓰는 스토리 노동자다.
지망생 시절, 당장 몇 달을 버티게 해 줄 지원사업을 찾고, 외주사이트를 전전하고, 공모전에 낙방한 것에 실망하며 우울함에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소주를 들이켜던 날들.
'예술이 뭐니 하면서 나대는 놈들이 제일 한심해.'
'한국은 글렀어, 돈 주고 작품을 사보질 않는데 이게 다 무슨 의미인데?'
'걔는 아직도 그 짓 하고 산데? 대체 언제 정신 차리는데.'
그런 날이면 자연스레 예술이 뭐니, 세상이 썩었니 저주를 퍼붓거나, 나보다 조금이라도 처지가 좋지 않은 누군가를 뒷말로 깔아뭉갰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자존감을 보호하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열등감과 자의식과잉으로 똘똘 뭉친, 찌질함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나. 그럼에도 나는 자신을 스토리 노동자, 즉 '아티스트'라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다음 웹툰에서 연재 중인 한 웹툰을 만나게 됐다.
"어, 이거 완전 내 얘기네."
1화를 클릭하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수한 배경음악과 함께 웹툰은 나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췄다.
죽음으로 대중에게 유명세를 타게 된 뮤지션을 '부럽다'고 말하는 소설가 '신득녕'.
마음에 드는 이성 앞에서 코를 벌름대며, 허세를 부리는 화가 '곽경수'.
술에 취해 길거리의 비싼 자동차를 발로 뻥뻥 차버리는 뮤지션 '천종섭'까지...
이 세 사람에게 예술은 늪이다. 꿈이라는 꽃을 좇아 들어왔지만, 악취 나는 진창에 빠져 천천히 가라앉는 늪.
셋은 게토 탈출을 꿈꾸며, 예술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한다.
나는 돈만 아는 성공한 아티스트와는 다르다고, 돈만 아는 'X 같은 놈들'과는 다르다 얘기하며 마지막 자존감을 지켜낸다.
"예술 한다는 놈들이 사고가 꽈~악~ 막혀가지고."
- 아티스트 10화 中, 화가 곽경수
작중에서 이들은 '예술'의 본질에 대해 술에 취할 때마다 끊임없이 얘기를 나눈다.
하지만 이야기를 보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니들이 말하는 예술이 뭔데?'
그들이 말하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얘기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또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타인을 깎아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어느덧 그들에게 '예술의 본질'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을 숨 쉬게 하는 유일한 구멍이 된다.
'예술'이라는, 만 명이 있으면 모두가 다른 정의를 할 단어. 나 또한 친구들과, 또는 SNS를 통해 많은 논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들의 앞에서는 신나게 떠들었지만, 정작 스토리 노동자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지금도 예술이 무엇인지 설명해보라면 전혀 설명할 자신이 없다.
이건 나 또한 '아티스트 속' 그들과 같았기 때문에, 어쩌면 지금도 같은 인간이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예술이라는 단어를 보잘것없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으니까, 정말로 진지하게 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
"예술은 귀족들이나 하던 거야."
- 아티스트 9화 중, 득녕의 작은아버지
물론, 예술이라는 단어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건 예술가 당사자들뿐만이 아니다.
아들이 소설 쓰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득녕의 가족과 친척들은 '예술'이라는 것을 '돈많은 것들이나 하는 것'으로 정의하며, 그를 깎아내린다.
이렇듯 아티스트라는 작품은, 각자의 입장에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예술'에 대한 단어에 대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 생각하는, 묘한 작품이었다.
"45세. 새해가 밝았다. 이제 내 나이 사십 오세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이룬 건 하나 없는데..."
- 아티스트 15화 중, 소설가 신득녕
작품이 중반을 지나가며, 세 인물은 각자의 방식을 통해 늪에서 탈출할 여태까지와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 뮤지션 종섭은 우연히 얻게 된 유명세를 통해, 화가 곽경식은 예술 권력에 빌붙어 빠르게 성장해 경제적 성공을 거머쥔다.
도착한 종착지가 그들이 운운하던 ‘순수한 예술'과는 거리가 먼 곳일지언정, 아무도 그것을 수치스러워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두둑해진 주머니에서 나온 돈을 후배들에게 용돈 삼아 건네며 '멋진 형'이 되고, 부하직원에게 소위 말하는 갑질을 하며 자존감을 한껏 챙기며 만족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일 뿐. 결국 '예술'은 그들의 자존감을 지킬 대체재가 생기면 언제든지 버려질 무언가일 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선생님, 새 책은 안 내세요?"
"다 늙어서 내면 뭐해. 나무만 죽지."
"지금 매일 쓰시는 저 글들은..."
"나 보려고 쓰는거야."
- 아티스트 27화 중, 소설과 신득녕과 스승님의 대화
하지만 단 한 명, 다른 길을 걷는 인물이 있다.
소설가 신득녕. 그는 자신이 써준 것이나 다름없는 글로 성공한 친구가 자신을 사기꾼으로 몰고, 가족들의 경멸이 가득한 시선을 보면서 끊임없이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괴롭고 고통스럽다. 답이 나오지 않자, 득녕은 자신에게 글을 알려준 선생에게 찾아간다. 동네 부동산에서 소소하게 싸구려커피를 마시며,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선생의 모습, 그 모든 것이 끝나고 득녕과 마주앉은 선생은 웃는 얼굴로 득녕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글은 나 보려고 쓰는 거야." 글을 자기만족을 위해 쓰는 것이라는 선생님의 한마디는, 득녕의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힘을 얻은 득녕은 다시 한 번 나아간다. 자신의 영역에서 크고 작은 성적을 내며 자신만의 '예술'의 의미를 찾는다. 오랜 시간 붙잡아왔던 소설의 문학상에서 대상을 타고, 자신과 비슷한 뜻을 가진 작가들을 모아 문예지를 만드는 등 크고 작은 성과를 올린다.
비록 완전하진 않지만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갑질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스스로의 못남을, 찌질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말이다.
그것이 다른 두 사람과는 조금 다른, 신득녕만의 '예술'인듯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득녕이 이룬 성취와 그를 통해 얻게된 힘들은 또 다시 그를 변화시키고 다른 불안을 야기한다.
다만 아티스트라는 작품은 '예술'이 무엇인지 그것이 각자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어떻게 이해되고, 정의되는지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
과연 예술이란 무엇일까? 매주 이 작품을 만날 때마다 내 머릿속은 이 질문으로 가득해진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예술'이 무엇인지 물음을 가져본 적이 있다면 꼭 이 웹툰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 작품이 '예술'을 그려내는 방식은, 적어도 나에게는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로 다가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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