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리뷰부문응모] <메이드 인 어비스> 아래로 아래로, 동경하니까


 <메이드 인 어비스>. 처음에는 이 둥글둥글하고 푹신푹신해 보이는 작품에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탐험가적인 열망, 흔히 '순수하다'라고 불릴 법한 무언가를 그려낸 작품이겠거니 생각했던 것 같다. 1화를 보고 '어비스'라는 설정을 알게 된 후로도 작품에 대한 흥미는 생겼지만 반드시 봐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제로 1화는 그림체에 어울리는 푹신푹신한 이야기였다. 앞으로 마냥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을 다 본 뒤, 나는 이 작품을 더없이 좋아하게 됐다. 빅홀, 어비스, 어비스의 저주, 어비스로 떠나는 모험, 이 모든 것은 세계와 삶에 대한 은유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떠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보물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삶 그것마저 걸어버리면서 내딛는 한 걸음.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이 몰락의 한 걸음은 자신의 삶에 맞닿는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인간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메이드 인 어비스>의 탐험가적인 눈은 그것을 '동경'이라고 부른다.







1. 동경, 그것을 위해 사는 삶


 리코는 어떻게든 엄마의 뒤를 쫓고 싶어 한다. 하얀 호루라기가 되고 훌륭한 탐험가가 되고 엄마를 만나는 게 리코의 목표다. 하지만 단지 만나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만은 아니다. 리코는 어비스를 동경하고 있다. 그 미지를, 아득히 멀리 있어 보이지 않는 자신의 엄마를 동경하는 것이다. 동시에 리코는 빅홀 마을에서 살고 있는 어린 여자애다. 가족은 없지만 가족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간다. 리코는 떠나야만 하는 탐굴가인 동시에 현실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다.




 결국 리코는 떠나고 만다. 엄마에게서 도착한 봉서에 '나락의 끝에서 기다린다'라는 편지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느릿한 성장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진 리코는 우연히 만난 로봇인 레그와 함께 모험을 강행한다. 하지만 리코를 움직인 그 편지는 터무니없이 간단하다. 제대로 된 정보는 무엇 하나 담고 있지 않다. 리코에게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리코를 도울 만한 건 죽을 위기에서 우연히 만난 로봇, 레그뿐이다. 상식적으로 리코가 떠나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아직 12살 남짓의 어린애고, 견습생인 빨간 호루라기고, 내려갔다간 다시 돌아오는 건 기대할 수 없다. 리코가 가려는 나락의 끝은 여전히 미지에 휩싸인 곳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는 수많은 베테랑들의 시체가 있다. 레그가 옆에 있다곤 해도 죽을 가능성은 하염없이 높아 보인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자신이 있던 곳도 포기해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들과도 이별해야 한다. 다시 만나자는 기약 따윈 없다.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고서도 목적을 이룰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그럼에도 리코는 떠나는 것이다. 정말 저 한 줄의 편지가 리코를 움직인 것인가? 아니, 편지는 그저 방아쇠다. 리코는 갈 수밖에 없었다. 후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리코를 살린 유물은 저주를 막는 물건 같은 게 아니다. 죽은 것을 되살리는 유물이다. 리코는 한 번 사산됐다가 되살아난 아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살아난 것은 어비스의 중심으로 향하려는 습성을 가진다. 말하자면 리코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탐굴가일 수밖에 없다. 리코는 스스로 탐굴가를 선택했지만, 동시에 탐굴가가 되도록 등 떠밀렸다. 도대체 무엇에? 도대체 누가 리코를 등 떠민 것인가? 리코의 선택은 완전한 자유일 수 없다. 그것은 분명 삶과 동시에 주어진 강제다. 살아있는 이상 어비스로 향해라. 그 명령은 어디서 내려온 것인가? 답은 어비스다. 어비스에 있는 미지의 유물이, 나락의 저편으로 뛰어내린 리코의 엄마가 그렇게 했다.

 그렇다면 리코의 모험은 그저 등 떠밀린 게 되는 것인가? 오젠의 말대로 리코는 오젠이 실험 삼아 바구니에 넣어 되살렸던 고기와 똑같은 존재인가? 그 답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봐야 한다. 간단한 언어로 정리되지 않는, 그 자리에 있는 리코의 행동을 봐야 한다. 그 행동의 연속,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리코라는 인간을 봐야 한다.



어비스는 둘을 떨어뜨려 놓는 동시에 연결한다. 어비스는 세계를 꿰뚫고 있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세계 그 자체이며 하늘이다. 그렇기에 어비스는 모든 것을 연결한다. 어비스로 뛰어드는 리코는 죽음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삶을 연결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보게 되는 건 소중한 것을 잃어가는 소녀다. 그 잃어버림을 스스로 선택하고자 하는 아이다.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까지 떠나려고 하는 탐험가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한 걸음을 세계에 의한 강제로 만들거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만드는가? 차라투스트라를 빌리자면(니체) '내가 그렇게 되길 원했다'라는 말일 것이고, 시지프를 빌리자면(까뮈) '모든 것이 잘 되었다'라는 말일 것이다. 사실은 수많은 우연이, 그것들의 어쩔 수 없는 결합이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리의 자유란 애초부터 그런 것들에 어설프게 매달아 놓은 이름표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그렇게 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연과 미지가 어비스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인간은 그것들을 두려워한다. 인간은 합리를 벗어난 우연과 미지에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꺼린다고 해서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눈을 돌린다고 우연과 미지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을 응시하고 오히려 그것에 뛰어드는 인간을 탐험가라고, 탐굴가라고 부른다. 그들이 쫓는 것은 동경이다. 우연과 미지에 대한 동경. 그 사랑이 그들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것은 삶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인간의 모습이다. 탐험가, 탐굴가는 인간의 소명이다.



라이자는 시간을 멈추는 종을 회수하기 위해 내려갔다. 수많은 동료가 죽었다. 하지만 라이자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리코를 선택한다. 리코는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얻은 라이자의 빛이다. 그러니 리코는 되살아난 고기 같은 게 아니다. 생물로서는 낳는 데 실패한 아이를 인간으로서 되살린 것이다. 리코의 탄생은 더없이 인간적이다.



2. 그러나 잔혹한 구멍

 <메이드 인 어비스>는 세계를 잔혹하게 그려낸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잔혹한 것을 피하지 않는다. 일어날 만한 잔혹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려고 한다. 이것은 종종 사람들이 <메이드 인 어비스>를 싫어하는 이유이고, 내가 <메이드 인 어비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리코가 뛰어든 어비스는 꿈과 희망만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도 마찬가지다. 석양에 타오른 구름이 아름답게 빛나는 그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죽는다. 나에게 살아갈 이유가 될 만큼 기쁜 일을 일으켜준 세계가 어딘가에선 누군가에게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만큼의 비극을 안긴다. 어비스 역시 동경의 대상이 되고 삶의 이유가 되고 심지어 신이 되는 동시에 탐굴가들을 죽이고 비극에 빠뜨리고 삶의 이유를 앗아가는 공간이 된다. 그렇기에 모든 기쁨과 슬픔은 이어져 있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른 무언가를 딛고 있다. 이 사실을 무시하고는 어떤 실존도 말할 수 없다. <메이드 인 어비스>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리코는 죽을 위기에 처하고 정신을 잃어간다. 그런 순간에 내린 결단은 감염된 팔을 잘라달라는 것이었다. 팔꿈치 아래를 남기기 위해 팔을 부러뜨리고 잘라달라. 나락의 끝에 함께 가고 싶다. 잔혹한 구멍에서 리코는 자신의 동경을 포기하지 않는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마저도.


 자신의 동경을 위해 어비스로 뛰어든 리코는 현실을 감내해야 한다. 몸의 모든 구멍들에서 피가 쏟아지고 독침에 찔린 손을 잘라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그런 현실이다. 만약 이것을 은폐했다면 <메이드 인 어비스>는 그저 그런 탐험 이야기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도 철저히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에 <메이드 인 어비스>는 '어비스'에 대한 고발이 되었다. 즉, 세계에 대한 고발이 됐다.



나나치는 '말로末路'라고 하기엔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인간성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잃으면서 얻은 모습이다. 그렇기에 나나치는 "폭신폭신한 인형"이라며 자조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메이드 인 어비스>의 잔혹성을 불편해하는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죄다 어린애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필자가 위에서 말한 고발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소년소녀는 곧잘 어떤 상징으로 쓰여왔다. 꿈, 도전, 열망, 상처와 성장. <메이드 인 어비스> 역시 그런 선상에 있다. 모험을 떠나는 12살 소녀.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지금까지 은폐되어왔던 건 무엇인가? 가장 끔찍한 비극은 가장 어리고 죄 없는 아이조차 가리지 않는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눈을 돌릴 뿐이다. <메이드 인 어비스>는 함께 눈을 돌리자는 암묵적인 약속을 어긴다. 우리는 12살 어린아이가 자신의 동경을 위해 모험을 떠나는 것에 긍정했다. 그런데 왜 그 아이가 당연한 비극 속에 비명 지르는 것은 똑바로 보지 못하는가?

 <메이드 인 어비스>에는 더러운 것들이 자주 등장한다. 배설물, 토사물, 혈뇨, 시체에 몰려드는 벌레. <메이드 인 어비스>는 이것들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드러낸다. 봐라, 이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모든 꿈은 현실을 딛고 있다. 모든 열망은 현실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어비스에 대한 동경은 어비스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리코의 동경은 리코가 비명을 지르는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에서 눈을 돌리지 마라. 이것이 <메이드 인 어비스>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던지는 메시지이다. <메이드 인 어비스>, 어비스에서 만들어진 유물론이다.



인간성을 잃은 미티는 처절한 모습을 하고 있다. 희망 따윈 보이지 않는다. 비극은 어린애를 피해 가지 않는다. 죽지도 못하고 살아있는 미티를 보라. <메이드 인 어비스>는 우리에게 미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눈앞에 놓인, 어쩔 수 없는 절망을 그려내는 것이다.


3. 그래도 아래로, 사랑하니까


리코가 먹고 있는 것은 식인을 하는 생물의 고기다. 레그가 그 사실에 거부반응을 보이자 리코는 오히려 태연한 반응을 보인다. 모든 것이 다른 것의 거름이 되고 그렇게 딛고 선 것은 다시 다른 것의 재료가 된다. 리코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레이션은 말한다. 그것들의 고통을, 너는 알 수 없다고. 그러니 딛고 나아가라고.


 이 끔찍한 구멍에서 리코는 밝은 모습을 잃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리코는 언제나 다시 일어나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리코를 따라다니는 레그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신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바람을 품고 리코와 함께 여행 한다. 어째서 이들은 이렇게까지 하는가? 다른 탐굴가들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 왜 그 모든 끔찍함을 알면서도 아래로, 아래로, 끊임없이 내려가는가?

 탐굴가들은, 리코는 알고 있다. 모든 것은 다른 것의 거름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은 다시 죽음으로써 다른 것을 살린다. 우리는 그 굴레 속에 있다. 아무리 선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희생을 포함하지 않을 수는 없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조차 시체를 딛고 선다. 이 굴레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반드시 다른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눈을 돌릴 것인가?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그런 굴레 속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속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그 의미조차 굴레에 먹혀버리진 않았는가?

 탐굴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내뱉어 버린 이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들이 찾는 답은 '어비스', 그 구멍에 있다.





 어비스에는 인간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유물로 남아있을 뿐,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는 온갖 생물들이 그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리코는 이곳을 사랑한다. 탐굴가는 이곳을 사랑하며 아래로 내려간다. 설령 도중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리코의 어머니 라이자는 그런 탐굴가 중에서도 하얀 호루라기, 가장 깊숙히 내려간 탐굴가 중 한 명이다. 누구보다 모험을 사랑하는 모험가, 동시에 자신이 사랑해 내려간 그 공간에서 자신의 아이를 잃은 어머니다. 라이자는 자신의 아이를 잃고, 유물로 되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에게 모험의 길을 열어주려고 한다. 지독한 사랑이다.



마르르크와 같은 곳에 머물 수도 있었다. 헤어지는 건 슬픈 일이다. 하지만 아래로 향해야 한다. 소중한 만남은 다시 헤어짐으로 마무리된다. 그것을 스스로 선택한다. 그런데 이들의 눈물을 보라. 이들은 헤어짐을 알면서도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모험이다.


 <메이드 인 어비스>가 말하는 동경은 탐험가의 사랑이다. 삶의 이유이다. 탐험가, 탐굴가,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것을 향해 한 걸음 내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미지이며 우연에 휩싸여 있고 위험하다. 그것은 나를 다치게 하고 절망하게 하며 심지어 죽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사랑한다. 나를 죽이는 것을 사랑하며, 그렇다고 생물로서의 인간을 버리지도 못하고, 모순된 모험을 강행한다. 나는 이런 삶의 방식을 사랑한다. 그리고 누구든 자신의 삶을 정면에서 마주 봤을 때, 이런 삶의 방식과 마주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리코는 치명적인 고통 속에서 다른 고통과 마주한다. 고통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 눈을 마주친다. 미티는 인간성을 상실한 채 고통을 느끼며 죽지 못하고 묶여 있는 생명이다. 리코는 태어나는 순간 죽었으며 어비스의 유물로 되살아났다. 이 둘은 서로를 마주 본다. 서로의 고통을 바라본다.



부동경 오젠. 그녀는 등장과 동시에 공허한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녀는 긴 시간 하얀 호루라기를 유지하고 있다. 그 말은, 다른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든 시간 동안 어비스에 있었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는 그녀의 공허함을 견디고 있다. 이 공허함 역시 어비스의 본질이자 삶에 도사린 독이다. 이것은 동경하는 것을 향해 내딛는 한 걸음에조차 서려 있다. 탐굴가는 떠남으로써 공허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공허함에서 벗어나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마주하는 것이고 응시하는 것이다.


 메이드 인 어비스. 탐굴가들은 어쩌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지도 모른다. 마치 리코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가듯, 뿌리를 향해,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이것은 몰락의 여행이다. 탐굴가들은 필연적으로 소중한 것들을 잃는다. 어비스는 탐굴가들을 끌어들이되 돌아가는 걸 좀처럼 용서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게 한다. 이들은 이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비스에 발을 들이민다. 도대체 뭔지도 모르는 그것을 위해, 그 미지를 위해, 어쩌면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아래로, 아래로 향한다. 동경하니까. 사랑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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