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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은 시네마가 아니다”라는 마틴 스콜세지, 그리고 “기생충”의 드라마화

에디터 이재민

“마블은 시네마가 아니다”라는 마틴 스콜세지, 그리고 “기생충”의 드라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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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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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 OPINION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미국 드라마로 재탄생한다. 아직 리메이크가 될지, 속편이 될지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봉준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속편은 15년 후쯤 뒤에 은퇴할 때쯤 만들지 않을까”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 드라마 형태의 리메이크에 무게가 실린다. 감독도 이미 정해졌다. <빅 쇼트>를 연출했던 아담 맥케이 감독과 봉준호 감독이 공동제작을 한다고 알려졌다.

 

<기생충>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포함해 미국의 비평가협회 상을 휩쓰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흥행도 뒤지지 않는다. 세계 흥행 수익은 1억 3200만 달러(한화 약 1,520억원)를 넘겼다. 한국 관객은 1천만명을 넘겼다. 정확한 관객 숫자는 아직 집계중이지만, 이미 한국에서 발생한 수익과 해외 관객 수익이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로튼토마토에서는 평론가 평점 99%, 관객평점 93%를 기록했다. 흥행과 작품성을 모두 잡은 작품이라는 평가다. 뭐, 보시다시피.

 

* "시네마"가 아니라는 말

 

<기생충>의 사례는 시장성(대중성)과 작품성의 대결이라는 낡은 논쟁을 이제는 넘어서야 한다는 신호처럼 읽혔다. 우리는 항상 시장성과 작품성을 대결하는 것으로 보아왔다. 작품성이 높아 더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하는 작품을 ‘악당’ 배급사들이 점령한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없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상을 다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상을 받은(42관왕에서 세는걸 포기했다) <벌새>의 관객이 15만명인 것을 보고, 사람들은 한숨을 쉬었다. <윤희에게>는 그보다 더 적은 11만명이 봤다. 사람들은 “진짜 작품을 몰라보는 대중”을 비난한다.

 

거장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감독 중 한명인 마틴 스콜세지는 “마블 영화는 영화(Cinema)가 아니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스콜세지는 거장들의 영화들을 언급하며 “예전에 영화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스크린을 통해 예상치 못한 것들과 마주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삶 속에서 각색과 해석을 반복하며 예술이라는 형태로 확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동시에 “현대 프랜차이즈 영화의 근본은 상품으로 소비될 때까지 마켓 리서치와, 관객 테스트, 점검, 수정, 또 다른 점검의 과정을 거쳐 준비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스콜세지는 이런 점검 과정에서 ‘위험 요소를 제거’하게 되며, 완벽한 프로덕션, 재능있는 스태프들이 팀을 이뤄 참여하지만 감독으로 대표되는 예술가의 비전은 이 과정에서 ‘위험요소’로 평가되고, 이런 위험요소가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현대 영화 예술의 가장 큰 위협이라고 진단했다.

 

2019 영화 수익 탑10. 단위는 백만 달러. 상위 5위 중 3 작품이 MCU다.

 

스콜세지의 관점을 빌리자면 ‘시장성’의 정점에는 마블이 있다. 거꾸로 돌아가 보자. 스콜세지의 관점에는 마블 원작의 만화가 빠져있다. 마블스튜디오의 수장 케빈 파이기는 ‘크리에이티브 위원회(Creative Committee)’를 만들어 열혈 팬 6명과 열띈 토론을 벌여 스토리를 다듬는다. 감독의 권한은 제작으로 축소되고, 팬들이 토론을 통해, 그리고 그동안 축적된 데이터와 경험을 통해 캐릭터를 세팅한다. 그렇게, 마블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프랜차이즈를 만들었다. 그 이름은 시네마 유니버스가 아니다. '시네마틱' 유니버스다. 마블은 어디까지나 만화의 연장선에서 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마블은 '시네마'가 아니라 '영화를 통한 시네마틱한 경험을 제공' 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었다. 

 

한쪽에선 2010년대 최악의 비극으로 '스타 배우의 멸종'을 꼽은 칼럼도 있었다. 상품이 되어버린 배우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 기사였다. ‘그 배우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사라지고, 누구든 할 수 있는 것에 배우들을 끼워 맞춘다는 비판이다. 그러면서 ‘캡틴 아메리카’ 크리스 에반스의 다른 출연작을 2개만 대 보라고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배역을 맡은 배우를 기억하지 못하고 '캐릭터'만을 기억한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가지 묻고 싶다. 우리는 MCU의 작품들에서 작품성을 정말로 발견하지 못하는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며 눈물 흘린 사람들의 지난 10년은 ‘가짜’를 보고 흘린 눈물인가? 그들이 극장에서 경험한 것은 ‘시네마적인(Cinematic)’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까? 스콜세지의 말과는 조금 다르지만, 시장성과 작품성을 하나로 본다면, 시장성의 정점에 있는 MCU는 작품성이 없거나 엉망이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시장성과 작품성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얼마든지 함께 갈 수 있는 동반 관계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균형을 찾기 힘들어 했을 뿐이다.

 

* 그건 만화가 아니라는 말

 

대중매체로서 만화와 영화의 역사는 큰 차이가 없다. 일단 '대중'이 등장해야 대중매체가 기능하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애니메이션은 1892년 <Pauvre Pierrot>, 최초의 영화는 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으로 본다. 만화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는 분분하지만, 한국 최초의 만화는 1909년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삽화를 시작으로 본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대중매체를 통해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집에서 그려 주변 사람들에게만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기 위한 작품이며, 동시에 프린트(출판)-영사(재생)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특징을 가진다.

 

뿐만 아니라 연출 등에서도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영화 속 미장센(mise en scène)과 웹툰의 배경은 감독-작가가 원하는 시각적 요소를 배열하는 것으로, 분명한 효과를 위해 의도적으로 배열한 시각정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연출상의 소위 ‘카메라워크’ 역시 많은 부분을 닮아 있다. 실제로 작년 흥행작인 <엑시트>를 보면, 만화 애호가에게는 만화적 연출로 보일만한 장면들이 많이 눈에 띈다. 거장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을 보면 마치 '카메라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경우를 거의 전 페이지에 걸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대중적으로도 엄청나게 성공했다.

 

 

이 유명한(...) 짤방 역시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다. 인물들을 잡는 앵글과 구도를 보자.

 

 

영화와 만화가 다른 점이라면 배우가 서느냐, 작가가 그려서 채워 넣느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화적 과장’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영화는 감독의 주도하에 스태프들이 영화를 만들거나(시네마), 집단창작을 통해 상품으로 가공(시네마틱)한다. 만화는 작가가 혼자서 모든 것을 완성해왔고, 최근에는 스튜디오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공통점 외에도, 또다른 공통점이 있다. 전혀 다른 맥락에서 생겨났지만 같은 결론으로 치닫는다. 주간 마감이라는 거대한 벽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주간마감을 지키기 위해 작가들은 퀄리티와 마감이라는 대결구도 안에서 씨름한다. 결론적으로 마감이 원고료(또는 MG)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작가들은 퀄리티를 낮추거나, 최소한의 타협점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작가의 역량이 발휘될 기회를 많이 놓쳐버린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위험요소’를 줄이기 위해 1인 창작 위주였던 만화가 스튜디오 체제로 옮겨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시장이 ‘팔리는’ 작품 위주로 시장이 재편될 가능성을 걱정한다. 이런 상황을 두고,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할 것이다. 

 

“그건 만화가 아니다.”

 

다시 묻고 싶다. 진짜로 그건 ‘만화가 아닌’ 무언가일까? 그건 ‘만화’라서 괜찮은 걸까? 스콜세지의 말과 누군가가 전한 말에서 빠져 있는건 관객과 독자의 반응이다. 플랫폼의 독점적 지위, 그리고 자본에 의한 잠식은 우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취향의 획일화 역시 우려해야 한다. 작법 자체가 달라지고, 일회성 소비로 그치는 것 역시 우려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걱정해야 하는 것은 이것 때문에 작가들의 작품 다양성이 줄어들거나, ‘찍어낸’ 작품들의 퀄리티가 지나치게 떨어져서 엉망진창으로 시장이 망가지는 최악의 상황이다. 스콜세지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스콜세지의 말을 인용해 마구잡이로 ‘그건 만화-웹툰-영화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건 그냥 거장의 말을 옮겨 평가하고 싶은 사람들의 말이 된다.

 

* 성전의 주인이 바뀌었을 때

 

봉준호는 영화를 “적어도 2시간동안 앉아서 볼 수밖에 없는” 특성을 매력으로 꼽았다. 그런 의미에서 극장은 성전(聖殿)이다. 앞으로도 한동안 극장이 주는 감각, 그리고 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보는 경험과 소비 방식은 다른 매체가 따라할 수 없는 특수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리메이크가 예고된 <기생충>은 극장을 벗어났다. 송강호와 조여정, 박소담은 다른 배우들로 채워질지도 모른다. 시네마를 벗어나 ‘누구나 해도 되는’ 배역을 가진 작품으로 '전락'해버린 <기생충>의 리메이크에 ‘그게 그거랑 같냐’는 말로 답할 수 있을까? 만약 아니라면, 우리는 왜 그럴 수 없을까? 골든글로브를 받은, 오스카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이라서?

 

물론 <기생충>은 훌륭한 영화다. 봉준호의 비전이 깃든 작품이며, 우리는 그가 성장해오는 과정을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알고 있다. 감독 개인의 비전이 들어간 ‘시네마’의 시대가 가고 그와 비슷한 경험을 주는데 집중하는 ‘시네마틱’의 시대가 왔다고 해도, 사람들은 시네마에 도전할 것이다. 다만, 성전의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다. 시네마의 주인이 바뀌었다면 그에 맞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미 그런 모습들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넷플릭스는 감독에게 전권을 주고 오리지널 영화를 제작한 다음, 극장에서 개봉한 후에 넷플릭스에서 서비스한다. 전통적인 시네마의 방식에 더해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 중 하나인 <아이리시맨>의 감독은 마틴 스콜세지이며, 이 영화의 제작비는 1억 5천 9백만달러, 우리 돈으로 약 1,838억원이다.

 


<기생충>의 드라마화 역시 마찬가지다. 최종적으로 HBO가 낙찰될 것이란 이야기가 나오는 가운데, 가장 큰 경쟁자가 넷플릭스였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 결과 아마도 작품이 더 비싼 가격에, 더 좋은 조건에 리메이크가 결정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좋은 작품이 다른 방식으로 더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그건 대중 예술로서의 가치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신경 써야 하는 건 작품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접근하고, 선택 받고, 평가 받을 수 있는 공정한 기회다. 영화관이라는 성전 역시 휠체어 탄 사람에겐 자리 선택권 자체가 없다거나 하는 관객의 접근은 물론 ‘시네마틱’ 유니버스 시스템이 감독들에게서 공정한 기회를 박탈(스콜세지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이 지점이다.)해 버린다거나 하는 '폭거'를 막을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만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데이터로 작품을 분석해 만들어낸 작품이 전부가 되어버리는 시장, 인디 시장이 죽고 플랫폼이 모든 독자를 빨아들이는 세상을 거부한다. 다행히 웹툰에도 또 다른 방식이 등장했다. 포스타입, 딜리헙과 같은 오픈 플랫폼이다. 작가들은 1인 창작을 멈추지 않았고, 작가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곳들이 때 맞춰 등장하고 있다. 상업적 작품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있는 작가는 스튜디오 시스템을, 1인 창작을 원하는 작가는 오픈 플랫폼에서 연재할 수 있지만, 아직까진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독자들 역시 적지 않게 이런 플랫폼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능력 있는 작가에게 ‘다음’을 약속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여태까지 그러지 않았으니, 무한 경쟁 속에서 능력 있는 작가들이 포기하도록 방치해도 되는 것일까?

 

봉준호도, 스콜세지도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았다. 대중 예술에서 네임밸류는 무시할 수 없는 티켓파워를 가진다. 그 네임밸류를 쌓기 위해선 '다음'이 필요하다. <벌새>를 연출한 김보라 감독과 호평을 받은 작품인 <윤희에게>를 연출한 임대형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김보라 감독은 두번째 영화에서 ‘기회’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대형 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이다. 공교롭게도 김보라 감독은 영화가 지금까지 '발견' 해내지 못한 여성 감독이다. 영화계에는 '다음'이 나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우리는 포스트 봉준호 시대를 생각보다 빠르게 만날지도 모른다.

 

플랫폼에서 데뷔한 웹툰 작가가 차기작에 들어가는 비율은 30% 정도로 알려져 있다. 좋은 창작은 안정된 환경에서 나온다.​ 우리는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고 있을까? 스콜세지의 메시지와 <기생충>의 드라마화는 만화와 웹툰이 들여다봐야 하는 지점을 드러내고 있다. 영화는 100년을 버텨냈다. 스콜세지의 발언에서 가장 부러웠던 건, 그 백년을 버텨낸 저력이었다. 거장이 걱정하는 것은 시스템의 붕괴로 더이상 새로운 세대가 나오지 못할지도 모를 미래였다. 그렇다면, 웹툰은 버텨낼 수 있을까? 우리는 '다음'을 만들고, 시스템의 붕괴를 걱정하는 어른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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