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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탕 2화] 얼굴이 어떻게 개연성이 돼요? 되더라고요. 아, 근데…

외부필진 최윤주

[그로탕 2화] 얼굴이 어떻게 개연성이 돼요? 되더라고요. 아, 근데…

외부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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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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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

 


 

 

이 집 얼굴 잘하네요

 시각적 상상력이 뛰어나지 않다. 소설을 읽다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모’ 같은 서술을 만나도, 그거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한 번 방지턱에 걸리면 몰입이 쉽지 않아서 오죽하면 평소 관심도 없던 서양 미남 같은 것을 구글에 검색해보기까지 한다. (중세 유럽풍 미남이니까 서양 미남 검색이 맞는 거겠지?) 미학에도 문외한이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에 인물의 미모를 구현해내는 일이 언제나 어려웠다. 그거 뭐 못 한다고 큰일이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뭐랄까. 미슐랭 쓰리스타 식당에 가서 겨우 짠맛, 단맛만 구분해내는 기분이라고 하면 심경이 전달될지 모르겠다.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는 감각의 지평을 마음껏 여행하는 일이 창작물에 충실하고자 하는 독자의 의무이자 권리, 라고 믿고 있기에 아주 가끔 분하고 서럽다.

 인기 소설을 웹툰화하는 코미컬라이즈의 성행이 반가운 데는 저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인 기쁨이 큰 것은 그래서다. 나처럼 미적 상상력이 빈약한 이라면, 작화가의 풍요로운 시각적 상상력에 탑승해 중세의 외피를 입은 이세계(異世界)를 실감나게 여행하는 일이 반갑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일례로 웹툰 <잘못된 고백>(각색 해녹, 원작 코오아라, 카카오페이지)은 나 혼자서 소설을 읽었다면 결코 도달할 수 없었을 미적 지평을 열어주는 작품이다. 정성스레 세공된(그렇게밖에는 말할 수가 없는) 인물들의 용안을 보고 있자면 게을렀던 내 상상력을 겸허히 반성하게 된다. 정말이지 이 작품은 알아드리지 않으면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인물들의 미모를 그려내는 일에 진심이니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죽음의 전장귀”라고 불리우는 흑발 미남 카베르와 ““제국의 빛”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1화) 금발 미남 엘비니라즈가 그 요주의 인물들이다. (물론 다른 인물들도 타협 없이 아름답다.)

 

웹툰 <잘못된 고백> 37화의 엘비니라즈. 참고로 이 컷은 '가장 잘 생기고 적절한 컷은 무엇인가'를 두고 여러 후보컷들 중에서 고심한 끝에 신중하게 선정되었다.


 얼굴이 재밌어서 찾게 된다는 유명 연예인의 브이로그나 A컷 중 A컷만을 고르고 고른 화보집도 이 만화(남자들) 앞에서는 긴장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해와 달조차 그들의 미모를 위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 빛은 왜 엘비니라즈를 향해서만 내리쬐는 걸까. 오늘 밤 달빛이 이토록 밝은 것은 카베르의 얼굴을 은은히 비추기 위함인가. 카베르의 고독에 음영을 드리우고 엘비니라즈의 우수에 찬 눈동자를 빛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들이 조명으로 동원된다. 그들이 웃을 때마다 시시각각 장미가 만개하고 천사라도 지나간 것인지 하늘에선 깃털이 나려온다. 결 좋은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는 때를 맞춘 바람은 어디서 자꾸 부는 것일까. 당신들, 작가님께 명절 선물은 보내고 있는 거야? 실없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 <잘못된 고백>은 제목 그대로 주인공 르네가 술에 취해 엉뚱한 상대에게 고백을 ‘잘못’ 건네면서 출발하는 이야기다. 엘비니라즈의 햇살 같은 온화함에 반해 결심한 고백이 하필이면 불면증에 시달려 안색도 무시무시하고 내뱉는 말들은 냉정한 카베르에게 전달되다니, 어떻게든 주워 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죽음의 전장귀가 기쁨이 은은하게 묻어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정히 이름으로 부르라 말한다. 분명 잘못된 고백인데, 이었는데, 그 얼굴을 보면 잘못되어가는 건 아무것도 없는 듯한 기분이 된다. 무시무시했던 얼굴도 다시 보니 퇴폐미나 처연미 아무튼 뭐 그런 것이 감도는 것 같다. (만약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낀다면 아마도 그건 당신이 금발파라서가 아닐까. 냉미남보다 온미남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 고백이 단단히 잘못됐다고 느낄 수 있는데, 엘비니라즈의 미모를 떠올려보면… 당신의 생각 역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웹툰 <잘못된 고백> 프롤로그의 카베르

​ 로판 속 호들갑 떠는 군중4에 빙의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댔다. 누군가 이 제동 없는 외모 상찬이 경박하다 비난해도 딱히 반박할 수 없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주관적인 호들갑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짚어두고 싶다. 바르시라는 인물이 그 증거다. 10년 경력의 우두머리 사제라는 약력이 무색하게 고작 경력 3년의 르네에게 재능으로 밀려 속 좁게 구는 비호감 조연인데, 웹툰을 통해 구현된 그의 얼굴은 비호감이라고도 조연이라고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대체 10년 경력을 언제 쌓은 것인지 의심스러운 앳된 얼굴에 청초한 물빛 머리카락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소설에선 딱히 바르시의 외형에 대한 묘사가 없었음에도) 당연히 아저씨일 거라고 상상하고 넘겼던 독자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바르시 사제 욕했는데 이런 얼굴이었다니…” 놀란 독자들은 말을 잇지 못했지만 이어질 말은 아마도 이런 것 아니었을까. ‘이러면 욕할 수가 없잖아요.’나 ‘이렇게 생길 거면 말해주지 그랬어요, 용서할 준비를 해뒀을 텐데.’ 로판에서 미모의 힘이란 이렇게나 강력하다.

미의 획일화를 반대하는 혁명가와 일단 잘생기고 보자는 리얼리스트의 협상안
 그런데 이쯤에서 너무 늦기 전에 고백해야 할 것이 있다. 사실 나는, 외모지상주의가 작품 내부에 침투하는 현상을 진지하게 비판하는 글1을 쓴 적이 있다. 웹툰 <여신강림>(야옹이, 네이버웹툰)을 경유해 그림이 예쁨에만 치중해 작화가 아닌 일러스트에 가깝게 소비될 때 발생하는 문제를 지적한 글이다. 그림이 감정 하나 묘사하지 못한 채 예쁘기만 해서 쓸모없어지고, 인물 묘사 방식이 미형으로 간주되는 특정 외형으로만 수렴하는 상황이 만화의 재미와 개성을 어떻게 위협하는지를 논했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심지어 공식적으로 처음 쓴 비평이었는데, 다시 말해 내가 지금 한 입으로 두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죄송합니다, 부디 나가지 마시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신나게 미모 찬사를 늘어놓은 짓이 외모지상주의 혐의로부터 결백하다고 주장한다면 가중 처벌당하겠지만, 변명을 하자면 이건 작품 감상에 있어… 말하자면 실감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토록 민감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미슐랭 쓰리스타 파스타를 먹고 왔다는 서술을 보고 백설 간편 파스타를 상상할 수는 없지 않나? 아무렴 백설 파스타가 맛있다고 한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황금처럼 빛나”며 “신을 영접한 것 같”은 미모라는데, “성당에서 잘 세공된 조각상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하는 것과 비슷”(소설 5화)할 만큼 잘생겼다는데, 석고상을 500원짜리 지점토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말했듯이 독자로서 의무와 권리를 모두 저버리는 일이다, 그건.

 무엇보다 <잘못된 고백>은 작화의 기능적 측면이 분명 살아 있는 작품이다. 내용 전달에 있어서는 그다지 매끄럽지 못해 아쉽기도 하지만, 장면 연출력이 좋다. 구도가 정확하고 표정 묘사가 섬세하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으나 분명 전설로 회자될 (아직 안 봤다면 대여보다 소장을 권할) 47화에 숨죽이고 몰입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꼼꼼히 계산된 작화가 충실히 제 몫을 해냄으로써 매혹적이고도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심상 기 비평문을 번복할 수도 없겠다. 그때의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잘못된 고백> 역시 특정한 미의 기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작품의 인물들을 아름답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는 다시 들춰보지 않고도 서술할 수 있다. 큰 눈과 갸름한 턱, 희고 깨끗한 피부, 마르고, 젊고, 상처 하나 없이 건강한 몸. 현실의 우리가 열렬히 흠모하는 그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바로 그 외형이다. 이는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모든 작중 인물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준인 동시에, 지금 생각나는 다른 어떤 작품을 들어도 동일하게 추출되는 ‘아름다움’이다. 플랫폼에 전시된 로판 표지를 훑을 때 거기엔 예쁜 작품과 덜 예쁜 작품이 있을 뿐 다른 방식으로 예쁘거나 예쁘지 않은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의 기준이 획일화되어 있기 때문에 위계가 발생한다.

 우리가 작품을 감상할 때 사용하는 눈은 현실 세계를 바라볼 때도 그대로 연속성을 가져서, 작중 인물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데 동원됐던 시력이 현실 속 타인을 평가하고 우리 자신을 추궁하는 일엔 자유로울 것이라고는 공교롭게도 장담할 수가 없다. 만화는 2D로 재현되어 있음에도 그 시각화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때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현실과 가까운 자리에 놓여 있다.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작용하는 미적 엄격함이 낳는 실제적 불평등,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 상당한 고통과 노력을 감수해야 한다는 진실2을 로맨스판타지를 즐기는 순간조차 완전하게 잊기 어려운 것은 그래서다.

 미형의 작화를 완성하기 위해 작가에게 요구되는 과중한 업무량을 생각하면 또 한 번 마음이 무거워진다. <잘못된 고백>은 최근 화에 이를수록 전만큼 완성도 있는 그림을 그려내고 있지는 못한데, 이에 대한 독자의 원성이 상당하다. 스토리의 전달력 문제 때문만이라고 하기엔 작화에 대한 불만이 압도적으로 많다. 댓글창이 합심해 칭찬과 질타를 오가며 학생을 다그치는 무서운 입시 미술 선생님이라도 된 것 같다. 카카오페이지 AI 키토크의 작품 검색 키워드로 ‘손목이 아작날 것 같은’ 등이 목격되는 것을 보면 이런 상황이 이 작품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욕망이 지나칠 때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유감스럽고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것 같다.


웹툰 <잘못된 고백>의 키토크. '퀄리티 맛집인', '얼굴 맛집인', '혼신의 힘을 다한'에 이어 '손목 아작날 것 같은' 키워드가 있다.

 그러면 어쩌라는 말이냐. 잘 나가다 결국 심각한 소리나 하고 있고 역시 비평가는 어쩔 수 없다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다. 솔직히, 나도 답은 모르겠다. 엄밀하게 말해 이건 비평가의 의무라기보다 사사로운 내적 갈등에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획일적인 미적 기준을 뒤엎고 싶은 혁명가와 대충 당장의 미적 기준에 맞춰 작품을 향유하고 싶은 보수적 리얼리스트가 내 안에서 시시각각 충돌을 일으키는 중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글을 세상에 내보내도 되는 걸까 (분량은 이미 초과했는데) 고민이 되는 와중에, 다행히도 <황제와 여기사>(각색 팀이약(겨울, 헤윰), 원작 안경원숭이, 카카오페이지)의 코미컬라이즈 방식이 아둔한 독자에게 또 한 번 생각지도 못했던 상상력의 지평을 보여준다. <황제와 여기사>의 주인공 기사 폴리아나는 로판 여성주인공으로서는 드문 ‘박색’이라는 설정인데 작화를 맡은 겨울 작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색 설정도 전 너무나 좋아해서 가능한 한 박력을 살리고 싶었는데, 만화라는 매체에서 그림으로 그리게 되면 ‘못생김’에 대한 어떤 특정성(이목구비가 어떻게 생겼다거나, 덩치가 거대하다거나 등등)이 생겨 편견을 줄까봐 외모에 대한 묘사는 가능하면 빼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도 폴리아나의 정체성이 흐려지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마지막까지 지켜봐주심 감사하겠습니다! (19.01.16. 겨울 작가 트위터)
 어쩌면 독자가 작화가의 시각적 상상력에 기댄다는 것, 나아가 코미컬라이즈 만화의 상상력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적 기준은 원래부터 획일적이라고 심지어 과학적 증거가 제출되기도 하는 현실에서 한 뼘 벗어나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경험과 편견의 한계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발휘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향한 올바름과 쾌감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 타며 이세계(異世界)를 그려나가는 작가의 노력에 훌쩍 몸을 맡겨보는 것도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라 말해볼 수 있을까.

 아름다운 인물을 애정하고 그들을 지켜보는 일들이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못생긴’ 혹은 ‘아름답지 못한’ 인물을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보자. 귀찮고 성가시며 때로는 심심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인내심을 갖고 조금 각도를 틀어 이리저리 헤매다보면 다른 의미에서 훨씬 더 ‘아름다운’ 지평이 펼쳐져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여행할 수 있는 이 세계/이세계의 풍경이 풍요로워지는 일은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환영할 만한 일일 것이라고, 일단은 그렇게 믿고 싶다.​


 

1) 최윤주, 「만화, 우리가 진짜 보고 싶은 풍경」, https://www.kmas.or.kr/search/webzine/review/27203, 2019.

2)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2018, 251-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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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의 후일담은 팟캐스트 '웹투니스타'의 파일럿 방송 <그 비평가가 로판에 고료를 탕진한 사연>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