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만화상을 꼽으라면 두 상이 항상 꼽힙니다. 하비 상과 바로 이 상이죠. 아이스너 상입니다. 아이스너 상은 1988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만화상으로, 전설적인 만화가 윌 아이스너(Will Eisner)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상입니다. 보통 사후에 상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상은 아이스너가 살아있을 때 만들어졌습니다. 윌 아이스너는 1917년 태어나 2005년에 돌아가셨으니, 돌아가시기 전 최소 16년동안은 살아계실 때 시상식이 치러진 거죠.
* 아이스너 상이란 무엇인가
또, 아이스너 상의 시상식은 샌디에이고 코믹콘(Comic-Con)에서 개최됩니다. 샌디에이고 코믹콘은 미국 최대의 서브컬쳐 행사로 알려져 있고, 소위 ‘긱 한’ 작품 뿐 아니라 마블의 MCU 소속 배우들이나 감독들이 와서 쇼케이스를 여는 등 대중적인 행사의 한가운데서 발표되는 상입니다. 노미네이트 분야는 총 32가지 분야로, 익히 알려진 것처럼 ‘최우수 작품상’부터 펜터치를 담당하는 ‘잉커’, 스케치를 담당하는 ‘펜슬러’, 식자를 담당하는 ‘레터러’와 ‘컬러’까지 세부적인 분야에까지 시상합니다.

물론 이건 완전히 회사가 기획하고 그 안에서 작품을 ‘제작’해야 하는 스태프들을 기리기 위한 방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은 의미가 있죠. 그리고 2023년 아이스너상의 노미네이트 작품이 발표됐습니다. 심사위원은 만화가, 평론가는 물론 미국 만화의 근간을 이루는 만화 소매상, 도서관 사서, 학자와 코믹콘 조직위원회 등이 선발한 5~6인의 심사위원단이 노미네이트 작품을 선정합니다.
* 그래서 뭘 볼 것인가
32개 부문을 전부 들여다보면 좋겠지만, 사실 절반 이상은 뭔지 모르는 얘깁니다. 우리나라에는 생소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될 테니까요. 그래서 웹툰과 관련 있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찾았습니다. 바로 ‘웹코믹’ 부문입니다.
웹코믹 부문에는 총 다섯개의 작품이 노미네이트 됐습니다. 한국에선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서구권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레이첼 스마이스의 <로어 올림푸스>는 작년 수상작임에도 올해도 노미네이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네 작품이 미국의 ‘웹코믹’이 가지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걸 들여다 볼 겁니다.
그 네 작품은 그로버(Grover) 작가의 <Deeply Dave>, 토니 클리프(Tony Cliff)의 <Delilah Dirk: Practical Defence Against Piracy>, 마이클 아담 렝겔(Michael Adam Lengyel)의 <The Mannamong>, 그리고 조슈아 바크만(Joshua Barkman)의 <Spores>입니다.
1. <Deeply Dave> : 깊게, 더 깊게
<Deeply Dave>는 작품을 위한 홈페이지(http://www.deeplydave.com/)에서 감상이 가능합니다. 이 작품은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이 홈페이지에서만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선보였던 ‘모션툰(Motion Toon)’과 비슷한 방식을 채용했습니다. 모션툰은 정은경, 하일권 작가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고고고>처럼 패럴렉스 스크롤(Parallax Scroll)기법이 일부 적용되어 스크롤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를 보여주는 컷이 있는가 하면, GIF로 제작되어 반복되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일정 수준의 애니메이션 효과도 적용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잠수부인 데이브가 어머니가 탄 우주선을 구하기 위해 깊이, 깊이 잠수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작품을 ‘읽는 방식’입니다. 깊이 잠수한다는 수직적 움직임을 스크롤이 아닌 ‘컷’을 활용해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건데, ‘스크롤한다’는 감각은 오히려 ‘더보기’에서 이어집니다.
(출처: Deeply Dave 홈페이지)
스크롤을 내리다가 ‘덜컥’ 하고 멈추는 순간, 화면에는 “클릭해서 함께 뛰어내리기(CLICK HERE TO JUMP DOWN THE HOLE)”라는 문구가 눈에 보입니다. 독자가 클릭하면 눈을 질끈 감은 데이브가 바다 속 깊은 구멍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이 나오죠. 꽤 흥미로운 시도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선 수 년 전에 시도했었고 웹툰에서는 어느정도 재밌는 잔치를 벌인 다음 이제는 쓰지 않는 방법이지만, 미국에서는 독립만화씬에서 시도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출처: Grovertoons 홈페이지
사실 이 그로버라는 작가는 지금까지 총 다섯작품에 걸쳐 이런 시도를 해 오고 있는 작가입니다. <Jake Spooky>, <MOONWALK>, ‘내 친구 아서’의 패러디 <Arfer>, 최신작 <Emergency Salad>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시도가 돋보이는 작가입니다. 흥미로운 시도가 보기 즐거웠어요.
2. <Practical Defence Against Piracy> : ‘웹’ 인가 ‘코믹’인가
<Practical Defence Against Piracy>(아래부터는 PDAP로 줄이겠습니다)는 ‘웹’ 코믹으로 분류하기보다 웹 ‘코믹’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은 작품입니다. 굳이 웹이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히어로 코믹스가 아니라 ‘오리지널 그래픽노블’로 분류되는 작품이 가지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은 작품입니다.

웹에 게재되었지만 양면 펼침페이지로 볼 수 있고요, 모바일 가독성은 ‘아예’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모바일로 보면 양면 페이지가 그냥 위아래로 한 장씩 턱, 턱 붙어 나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의외로 폰트는 모바일에서 보았을 때에도 잘 읽힙니다. 그리고 다시 보면, 칸도 왠지 스마트폰에서 보기 거북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그래픽노블과 비교하면 조금 더 시원시원하고 큰 칸의 연출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또 작품을 쭉 읽다 보면, ‘이건 책으로 보라고 만들었구나’ 싶은 양면 펼침 컷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컷을 연속해서 쓰기도 하고요. 또 그만큼 공을 많이 들였다는 태가 나는 컷들의 밀도는 심상치 않습니다. 이것들 모두 웹툰에서는 쓰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웹’ 코믹인지, 웹 ‘코믹’인지, ‘웹코믹’인지 아직 명확하고 확실하게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흥미로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이 작품은 총 4권인데 1~3권이 아닌 4권이 일단 후보에 올라있네요. 밀도높은 작화와 비주얼은 만족스럽고, 연출이나 내용은 아직 물음표입니다.
3. <The Mannamong> : ‘미국 향’ 풀풀 나는 웹툰
<The Mannamong>은 우리가 ‘미국 웹툰’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렸음직한 웹툰입니다. 일단 선이 굵고 데포르메가 확실한 그림, 어딘가 ‘반짝이지 않는’ 컬러감,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크리처들의 등장, 어딘가 모르게 미대륙 선주민들의 이야기를 빌려온 듯한 내용 등 한국에서 보기 힘든 소재와 요소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재밌는 건, 이 작가는 2022년부터 캔바스에도 동시연재를 하고 있는데 ‘스크롤 연출’이 점점 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아직 ‘칸 안에 만화를 넣어 이야기를 이어간다’는 점을 깨뜨리진 못한 것 같지만, 칸 크기가 점점 커지고 시원시원해져서 ‘모바일 가독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같은 작품 내에서 연출이 바뀌어가는 것, 한국 웹툰의 2010년대를 생각나게 하죠? 작품을 만들고 보여주는 과정에서 작가가 느끼는 변화가 전면에 드러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다만 ‘새로운 걸 본다는 흥미로움’보단 미국의 독립만화씬에서 이런 작품이 있다는 걸 보는데 의의가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흥미롭긴 하지만, 적어도 에디터의 정서에는 크게 흥미롭거나 재밌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노미네이트 된 건, ‘아동 대상 만화’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홈페이지(https://mannamong.com/episode-1/)와 캔바스(https://www.webtoons.com/en/challenge/the-mannamong/list?title_no=755955)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4. <Spores> : 코로나 시대의 우화
아마 오늘 다루게 될 작가, 또는 ‘웹 코믹스’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모든 작가를 통틀어서 조슈아 바크만 작가는 가장 유명한 작가일 겁니다. 바로 아래 짤을 처음 만든 사람이거든요. 작은 뱁새가 무어라 말하고 있는데 까마귀가 와서 “까악” 하는 소리로 그 소리를 덮어버리고, 뱁새가 약간 기분나쁜 표정을 짓는 짤이요.
바로 이 레전드 짤을 만든 사람입니다
조슈아 바크만은 그만큼 다양한 작품을 해 온 만화가이기도 합니다. <False Knees>라는 작품으로도 잘 알려진 작가기도 하고,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이 그린 <Spores>는 ‘포자’라는 뜻을 가진 제목의 작품입니다. 여전히, 이 작가는 사람보다는 새와 쥐, 사슴과 딱정벌레를 다룹니다.

이 작품은 읽다 보면 왠지 섬뜩합니다. 시끄러운 새들 사이로 조용히 뻗어나온 빨간 포자가 작은 언덕을 뒤덮을 듯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그 포자에서 자라난 버섯을 먹은 동물들이 서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서로 소통하면서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왠지 이 작품은 ‘코로나 시대의 우화’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물에 빗대어 우리 세상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작가인 조슈아 바크만의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사실 보기엔 좀 불편한데, 이미지 몇 개씩을 이어서 계속 넘겨가면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웹으로도, 스마트폰으로도 보기 불편하긴 합니다. 다만 단어가 그리 어렵지 않고, 흑백으로 그려낸 동물들이 버섯을 먹고 말할 수 있게 된 이후의 연출이 꽤 흥미롭습니다. 특히 박새들이 시끄러운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진짜 그렇게 말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이 작품은 조슈아 바크만 작가의 홈페이지(https://falseknees.com/22ink1.html)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의 아이스너상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들을 알아봤습니다. 작품별로 특색이 다양하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이들 작가들이 ‘생존’하기 위해 택한 건 크게 두가지인데, 하나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굿즈 판매하기, 두번째는 패트리온(Patreon)후원 받기입니다. 아직 ‘자생할 수 있는’ 정도의 사이즈는 아니지만 꾸준히 주목할 만한 작가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건, 미국 독립만화가 가진 저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에디터는 다음 칼럼에서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져오겠습니다. 다음 칼럼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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